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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원포인트 꽁트

1. 신


https://www.flickr.com/photos/maleny_steve/2187071232/in/photostream/



 

 

그날 밤까지, 소년에게 생은 흐리고 모호한 ‘덩어리’에 불과했다.

 

어느 해 겨울, 소년은 북방 신대륙 행 홍보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 전까지 소년은 해외로 나갈 생각도, 비행기를 탈 생각도, 여행을 떠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잡지를 잡은 순간 소년은 그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오직 그 생각만이 소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무것도 명징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그 잡지 속에 그려진 거대한 산맥과 새하얀 눈덩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변할 것 같았다.

 

이후 어떻게 소년이 신대륙으로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소년의 발이 결국 신대륙 북단의 땅을 밟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밟은 바다 건너의 땅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곳은 춥고 눈으로 가득했으며 아이들은 설원과 함께 자라 얼음 위에서 뛰어 다녔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이국의 풍경과 다른 인종의 사람들, 귀에 설은 언어를 보고 들으며 소년은 흥분했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소년은 그 모든 기이한 것들에게 익숙해졌다. 끝을 모를 드넓은 도시도, 색색의 인종이 서로 떠들며 쇼핑몰을 누비는 광경도, 어렸을 때부터 배웠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이국의 언어가 귀를 가득 메우는 감각조차도, 모두 평범하고 지루하며 모호한 회색의 덩어리들로 변해 버렸다.

 

소년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뒤바뀌었지만 소년은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모호하고 흐릿했으며 불투명한 회색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소년의 시야에 선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귀에는 명징한 소리 한 번이 들어온 적이 없으며, 코는 오히려 추위와 콧물에 가로막혀 더 쓸모가 없어져버린 뒤였다.

 

기대는 버렸고, 절망은 없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방의 땅으로 오기 전처럼.

 

그러다 소년은 이역에 와 사귄 친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로키 산맥에 스키를 타러 가지 않을래?”

이역의 땅은 춥고 눈이 많다. 아이들은 설원을 뒹굴며 자라 얼음을 뛰어다니는 어른이 된다. 소년은 별 기대감 없이 응했다.

그곳에서 소년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산맥과 끝을 모를 높다란 수천년 수령의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보았다. 수천 미터 해발의 높이에서 눈을 헤치며 지상을 향해 질주했다. 잠깐의 재미와 흥분된 시간이 지나갔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년이 예상했던 대로.

 

그 일은 돌아올 때 일어났다.

 

스키는 끝났다.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소년이 숙소로 돌아가려면 다른 버스로 환승해야만 했다. 그러나 소년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남은 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버스가 마지막 차였다. 밤의 이방에는 더 이상 이방인인 소년이 이용할 교통수단이 없었다.

 

소년은 결정해야 했다.

다시 스키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숙소로 갈 것인가.

어느 쪽이든 걸어서 돌아가야 했다. 소년은 거리의 온도계를 응시했고, 온도계에는 영하 37도를 향해 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

발은 얼었고, 극도의 추위가 두통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소년을 엄습했다.

끝을 모를 도시의 거리는 수백년 수령의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나무는 온전히 흰 눈으로 덮여 가득했다. 칼과 같은 찬 바람이 소년의 얼굴을 직격했고 소년은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언 몸을 간신히 이끌어 발을 내디뎠다.

소년은 생각했다.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생각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생각했다. 살을 에고 베는 칼날 바람을 잊기 위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명징한 것은 없었다. 안개처럼, 덩어리처럼 모호할 뿐이다.

소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모호함 때문이었다.

 

끔찍했다.

주마등이라는 게 있다. 죽음의 순간, 사람은 자신의 생을 단 한 순간에 되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진실로 많은 상념이 순식간에 소년을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그의 생을 일 순간에 관통했다.

그의 생은 그가 보는 세상과 똑같이 모호한 덩어리에 불과했다.

소년은 그 끔찍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소년은 눈을 떴다.

명징하고 선명한 단 하나.

밤하늘이 눈앞에 있었다.

깊이 1미터의 눈더미 속에 주저앉은 채, 소년은 하염없이 선명한 밤하늘을 보았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히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 소년은 거대한 밤하늘을 보았다. 끝 간데 모를 창공, 인공의 전조등이 모두 꺼져버린 어둠의 거리, 밤하늘을 밝히는 무한의 별.

 

달은 없었지만 폴라리스가 있었다.

폴라리스는 모호한 별이다. 지구에서 빛이 800년 가야 닿을 거리에 있다. 심지어 만년 전에는 저 폴라리스는 북극에 있지도 않았다. 지구의 축이 주기로 바뀌는 탓이다.

세상만큼이나 흐릿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그 순간, 명징한 하늘의 중심점에 선 폴라리스는 그 모든 모호함을 뒤엎을 정도로 선명했다.

 

폴라리스는 진실로 이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존재였다.

동시에 이 명징한 세계는 온전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소년의 마음 속에서.

 

그때, 그 순간, 소년은 깨달았다.

 

세계가 모호하고 흐릿한 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모호하고 흐릿한 덩어리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소년은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선명한 존재가, 이 모호하고 흐릿하며 형체를 알 수 없는 세상에서 홀로 선명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소년이 선명해진 순간, 이 세계도 선명해진다.

 

마치 구원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은 세상에 임재하여 사람과 세상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날 밤, 소년은 신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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