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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단편소설

문학소녀


어느날 갑자기, 글이 그녀를 떠나갔다. 더 이상 그녀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것은 봄, 모든 것이 새롭던 그 때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와 처음 보는 학교, 그리고 처음 보괴 된 사람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새로운 것과 부딪쳤고,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다른 새 것과 맞닥뜨렸다. 처음엔 마냥 신기하고 신날 뿐이었지만, 나중엔 정신이 없어 비명을 지르고만 싶을 지경이었다.

그 날도 그녀는 반은 신나고 반은 비명을 지를 듯한 기분으로 캠퍼스 안을 걷고 있었다. 길에선 벤드 하나가 공연을 신나게 벌이고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떠들어댔다. 정신없고, 산만하고, 생각도 못하고, 단지 남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시간이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 그녀를 붙잡은 것은. 

“너, 글 쓸 줄 알아?”

첫 선택.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왜 돌렸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많은 것이 역시 달라졌다.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남자 하나. 그다지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고, 특별히 세련된 스타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자신있을 만한 구석은 없어 보였는데도. 

남자가 다시 물었다.

“너, 글 쓸 줄 아냐고. 책 많이 읽게 생겼는데.”

그녀는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런 남자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멀쩡히 길 가던 사람을 붙들어놓고 던진 말이 ‘글 쓸 줄’ 아냐는 거라니. 이건 헌팅도 아니고 대체 뭘 하자는 걸까. 따지고 보면 굉장히 무례하기도 했다. 다른 건 다 제쳐놓더라도 책 많이 읽게 생겼다느니 어쨌느니 하는 건 외모에 대한 놀림이다. 

나아가 성희롱에도 해당될 수 있는 소리.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더 까졌더라면, 당장 따귀 한 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곤 아주 쉽게 상황을 종결지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기엔 너무 얌전했다. 그녀는 따귀를 갈기거나 경찰서에 신고하는 대신,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씩 웃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잘 됐네. 따라와.”

두 번째 기로. 

그녀는 이 자리에서 남자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와 달리, 이 때는 상대가 누군지도 아는 상태였다. 사실 갑자기 나타난 수상쩍은 남자 따위, 뿌리치고 그냥 가버리면 그 뿐이다. 존중할 필요도 없고 따를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망설였다. 그리고 망설이는 그녀를 남자는 먹이라도 채가듯 잽싸게 끌고 갔다.

그들은 금방 밝고 시끌벅적한 대로를 벗어났다. 그녀는 이내 불안해졌다. 대체 그녀를 어디로 끌고 갈 속셈일까. 혹시 나쁜 짓이라도 계획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남자는 지금껏 그녀가 대학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사이 남자는 이미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겁에 질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질 무렵, 남자가 멈췄다. 낡은 건물의 구석진 문 앞이었다. 이 화려한 대학 캠퍼스에도 이런 건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남자는 문을 열며 웃었다. 
묘한 자신감이 흐르는 웃음. 

“들어와.”

마지막 기회.

그녀는 이때 도망칠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곤 원래 가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더 신나고 화려하며 재미있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대로로. 이런 이상한 건물 안으로 그녀가 들어가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주저했다. 그리고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 남자는 다시 그녀를 붙잡고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른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순간, 그녀는 약간 선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따뜻한 봄날에 어울리지 않게, 기이할 정도로 낮은 온도의 방이었다. 살갗에 와닿는 공기의 느낌도 축축했다. 무엇보다도 이 방에는 제대로 된 창이 없었다. 즉, 따사로운 봄햇볕이 단 하나도 들어서지 못하는 방이었다. 다만 창백한 형광등만이 말없이 빛났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애 둘, 여자 셋. 다들 형광등 만큼이나 창백해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앉아있는 여자가 가장 창백했다. 창백한 여자가 쏘듯 물었다.

“뭐야?”

그녀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끌고 온 남자가 대뜸 대신 답해버렸다.

“새내기야. 내가 데려왔으니 잘 봐달라구. ‘회장’.”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대체 누구 멋대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기가 막혔다. 그녀는 이 모임이 뭐하는 모임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녀는 이곳에 오겠다고 의사 표시를 한 적도 없었다. 단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왔을 뿐. 

하지만 방 안의 다른 이들은 그런 사정을 모른다. 자연 그들은 기대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모임이든 신입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는 쏟아지는 시선에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붉힌 채 그녀는 눈을 급히 돌렸다. 순간 ‘회장’이라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회장’이 물었다.

“시야, 소설이야?”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시? 소설? 그녀에게는 익숙한 단어. 하지만 요즘 세상엔 흔치 않은 단어. 그때서야 그녀는 상황을 조금, 아주 조금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긴 문학동아리구나.

그녀가 깨달은 대로였다. 이곳은 학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문학 동아리’였다.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고, 글을 쓰는 게 고루하게 여겨지는 쌈박한 대학 안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회장’이라 불리는 여자는 말 그대로 회장. 그리고 그녀를 억지로 끌고 온 남자는 부회장. 나머지는 선배거나 그녀처럼 자기도 모르게 끌려온 ‘신입’들.

그녀는 얼결에 이렇게 답해버렸다.

“글…… 이라면 다 좋아해요.”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시원찮은 대답이군. 뭐든 확실히 정해야지!”

새내기를 끌어들이려는 태도라기보다 무슨 논쟁 벌이는 사람 같은 태도였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물론 문학하는 사람들은 다 괴짜라는 소릴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좀 궤가 지나친 것 같았다. 갑자기 데려와 신입이라고 하는 거든, 들어온 신입을 메몰차게 대하는 거든. 

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을 말할 정도로 모진 성격이 못 되었다. 게다가 회장의 질문은 계속 이어져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책은 뭘 읽었느냐.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 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등. 자리를 술자리로 옮긴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녀를 비롯해 모인 사람 대부분이 새내기였다. 그리고 환영회는 보통 술집에서 열리기 마련이다. 정신없이 동기들, 선배들과 인사하며 그녀는 어느 사이에 이 ‘문학 동아리’의 일원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학 동아리의 이름은 ‘글내음’. 


글의 냄새라도 맡겠다는 걸까. 
그녀는 의문스러웠지만, 회장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글의 내음은 곧 여운. 글에 드러나지 않는 거지.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는 애들은 영원히 모를 이야기.”

행간을 읽다.
작가가 써놓은 것. 
그 이상을 읽어낸다는 이야기인 듯 했다. 

그녀는 그런 설명을 들으며 이곳이 앞으로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자기 소개, 회원 소개가 끝나고 맥주가 몇 잔 돌았을 때였다. 슬슬 이야기가 열이 오르고 수줍게 앉아있던 그녀도 한 마디씩 말을 꺼낼 무렵, 회장이 갑자기 그녀에게 말했다.

“너, 글 쓸 줄은 알지? 써와. 뭐가 되든 상관 없으니까.”

회장도 부회장 못지 않게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얼결에, 술김에, 오기에 그만 ‘예’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려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는.

***

물론 그녀는 책은 많이 읽었다. 
부회장이 한 눈에 간파한 대로였다. 그녀가 나서 자란 곳은 도시와 거리가 조금 먼 읍. 흔히들 말하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매일매일이 똑같은 지루한 공간이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의 아이들을 건강하고 자연스럽다며 찬탄하지만, 그건 실상 할 일이 없기에 더욱 활동적이 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지루할 수 밖에 없고, 스스로, 억지로라도 뭔가를 만들고 움직여야 살아나갈 수 있는 공간이 시골이다. 

사람들은 다들 그런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나서 자라는 동안 항상 지루했다. 

그녀에겐 늘 많은 시간이 주어졌고, 그녀는 그 시간을 참기가 어려웠다. 주위에 보이는 아이들은 왠지 유치해 같이 놀기 어렵고 그녀 스스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항상 모든 게 재미없고 침울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그 생각들을 충족시켜 줄 것은 전혀 없었다. 그 한적한 시골에서는. 

언제 처음 책을 잡았는지는 그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녀는 다른 또래들처럼 뛰어놀기엔 몸이 약했고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만 있을 정도로 병약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밖으로 나가 노는 것도, 안에 누워 앓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 하지만 그녀도 시골의 반복되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래들처럼. 

자연히 그녀는 앉아서, 또는 가만히,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듣고, 홀로 소꿉놀이를 하기도 하고, 골방에 앉아 TV만 멍하니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가 인식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책을 쥐고 있었다. 무심코 들었던 한 가지 책. 그 책은 옛날 전래동화였다.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도깨비가 나오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 

그때 처음으로 시간이 잊혀졌다. 그 할 일없던 지루한 시간이. 

그녀는 그 후로 한 권, 두 권, 책을 붙들었다. 책에 흠뻑 빠져 지내다 보니 자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주위를 돌아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시간이 버거워 책을 읽어댔다. 적어도 그녀는 책을 읽으며 그 시간들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주위 또래들을 슬슬 둘러볼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 주위엔 서로를 아끼는 또래 친구 집단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사이로 들어갈 틈은 없었다. 또래들은 이미 저마다 ‘친구 울타리’를 만들어 다른 집단 애들을 배척하곤 했다.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연히 다시 혼자가 되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친구를 만들려 애쓰는 대신 다시 책을 잡았다. 
그녀는 책과 그 안의 글을 ‘친구’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막 읽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여기며 읽어나갔다. 글을 읽을 때, 그녀는 때로 이야기 속의 공주가 되어 마법의 사과를 따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그녀는 시의 리듬과 구절에 취해 하루 종일 속으로 되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나중엔 친구가 없어 시작한 ‘책 읽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책은 그녀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 되었다. 어쩌면 책 읽기는,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 동안 유일하게 ‘즐거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글을 써보지는 못했다.

딱 한 번, 시도해 본 적은 있었다. 
시집 한 권을 음미하던 중이었다. 누가 잡아채가기라도 할 새라 소중히 시집을 부여잡고 시집의 오래된 퀴퀴한 책 향을 맡으며, 가끔씩 생각나는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며, 한 구절 한 구절을 읽던 참이었다. 몇 번이고 싯귀를 곱씹으며 즐거워하던 그녀의 눈에 문득 한 구절이 들어왔다. 


‘어느날 갑자기, 시가 나를 찾아왔어.’


왜 하필 이 구절이었는지는 그녀도 모른다. 다른 멋진 글귀도 많았는데. 다른 화려한 싯귀도 많았는데. 유독 그 구절을 읽을 때 그녀의 시선은 멈췄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며 그 싯귀를 되씹었다. 이 사람은, 이 시를 쓴 사람은 그렇게 시쓰기를 시작했을 거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시를 썼겠지.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붙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그녀는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흥분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이 사람처럼, 시와, 글하고만 살고 싶다. 

그리고 이 사람처럼 시를, 글을 써보고 싶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알았지만, 그건 독서가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열병’같은 거였다. 뭔가를 계속 읽다가 때로는 답답해서, 때로는 감동받아 새로운 걸 창조해 보려는 그런 ‘열병’이다. 그 열병은 한 번 시작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녀 자신조차도 멈출 수가 없을 정도다. 뭔가를 새롭게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해 글쓰기를 버릴 때까지 그 열병은 계속된다.

열병에 걸린 그녀는 어떻게든 그 열을 풀어버려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이 답답했고 문득 그 싯귀만 떠오르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느라 애먹었다. 그녀는 뭔가를 쓰고 싶었고, 써야만 이 상황이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책 읽기로 일관해온 그녀였다.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한 것도 ‘책’이었다. 다만 이 ‘책’은 보통 책이 아니라 ‘창작론’에 관련된 거였다. 그녀는 그 창작론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그 창작론들이 가르쳐준 유의사항, 순서에 대해 깊이 인지했다.
드디어 하루는 그녀는 끓어오르는 열을 참지 못한 채 책상머리에 펜과 원고지를 들고 앉았다. 그리곤 창작론에서 배운대로 쓰려는 글의 개요를 작성해 보았다. 개요에 따라 글을, 시를 써보려 첫 문장을 시도했다. 

단 하나도 써지지 않았다.

창작론은 다 외운 그녀였지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머릿속은 외운 창작론과 써보려는 글의 개요로, 가슴은 창조하고픈 욕망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정작 글을 쓰려고만 하면 머리는 백지장이 되고 가슴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버렸다. 이후엔 몇 차례나 시도했지만 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글쓰기는 포기하고 읽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고도 몇 년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난데없이 글을 쓰게 된 거였다. 

그녀는 턱에 손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그녀 앞에는 책상, 그리고 연필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컴퓨터도 있고 요즘은 워드로 글을 작성하는 자가 많다지만, 그녀는 항상 연필로 직접 쓰는 걸 선호했다. 물론 지금껏 그녀가 만족할 만한 글을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날,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그 날 이후 그녀는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글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생각의 나열에 불과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금은 더 심했다. 그녀는 그때, 그 날처럼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끙끙대다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벌써 세 시간을 써버렸건만 단 한줄도 쓰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글내음’에서 정한 정기 모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다란 손톱을 서로 마주치며,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뭔가 써야 했다. 
그녀가 전혀 예정했던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는 내일 그 모임에 나가야 했다. 
나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멋대로인 부회장과 무례한 회장이 있는 곳이긴 했다. 하지만 그곳은 왠지 모르게 그녀와 맞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예전부터 글을 한 번 써보고 싶었고, 그런 모임에 나가는 것은 기회 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일 그 모임에 나가려면 회장이 말했던 대로 글을 써가야 했다. 

문제는 단 한 줄도 글을 쓸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단 한 줄. 단 한 글자도. 막막하기만 했다. 대체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을 열고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창 밖에선 지나가는 차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봄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글 한 줄을 쓰지 못해 끙끙대고 있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대론 아무것도 안 돼.”

그녀는 자신이 무심코 한 말에 깜짝 놀랐다. 맞는 말이다. 아무것도 안 된다. 이대로 고민해봐야 계속 정지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아무 거라도 써보기로 했다. 책상 머리에 앉아 그녀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되는 대로 일단 아무 말이나 썼다. 뭔가 시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처음 쓴 문장은 이랬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썼을 때, 픽 웃어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쓴 문장이 아니었다면 두고두고 놀려댔을 문장이었다.

문장이란, 그녀가 그간 수십 번이나 읽어온 창작론에 따르면, 굉장히 쉬우면서도 어렵다. 하나의 시나 소설을 만드는 데 하루면 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년이 걸려서도 단 한줄의 문장을 쓰지 못해 대작을 쓰지 못하는 이도 있다. 

단지 읽는 것 뿐이라면 좀더 잘 생각하고 세심하게, 열심히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만드는 것, 글을 창조하는 건 전혀 다르다. 그랬기에 책을, 글 읽는 걸 그토록 좋아한 그녀도 지금껏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게다. 

어쨌든 그녀는 그 ‘한 줄’을 드디어 썼다. 어처구니 없더라도. 두고두고 놀림 거리가 될 한 줄이더라도. 그녀는 그 문장이 그녀 자신의 문제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녀는 내친 김에 더 써보기로 해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글씨는 예쁘게 쓸 수 있는데.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당겨야 할 글이 없어 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글을 쓰지 못한 다는 걸 깨달은 지는 오래. 벌써 십여년이 흘렀다…….


그녀는 어느덧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산문으로 써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게 늘 어려웠던 그녀. 그런 그녀가 어떻게 책과 만났고 글에는 어떤 식으로 도전해 왔는지를.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공책으로 3장이 넘는 글을 마치고 있었다. 그녀는 공책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시험이나 보고서를 제외하고, 그녀가 이렇게 긴 글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가슴 속에서부터 희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글을 제대로 쓰는 데 성공했다. 이 글이 어떤 글인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처음으로 해냈다는 거였다. 그녀는 글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날이 새고 있었다. 그녀가 밤을 새 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기쁨에 가득찬 그녀의 머릿속은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글내음 모임방에 다다라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여전했다. 글내음 방 안엔 여전히 불만 많은 얼굴의 여자, 회장과 자신감 넘치는 얼굴의 부회장. 그리고 몇몇 선배와 동기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줍게, 그러나 자랑스러움을 담아 글을 내놓았다. 떨리지만 기대에 넘쳤다. 회장은 글을 슥슥 읽어내리더니 주위에 글을 돌려 읽게 했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평가가 나올까.
문득 선배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음, 솔직하네요. 그리고…….”
“솔직하긴! 이건 절제가 모자란거야.”

회장의 일갈. 
그 일갈이 쇠망치가 되어 두근거리던 그녀 가슴을 후려쳤다. 기쁘기만 하던 기분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회장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솔직? 웃기긴. 요즘 자기 이야기 쓰는 소설가 많긴 하지. 집에 틀어박혀 폐인 생활 하는 자폐적 이야기. 뭐, 그렇다 해도 솔직한 거 좋아. 단순, 간결한 것도 나쁠거 없지. 하지만 그럼 뭐해. 이런 글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쓰려다 망가진 글이야. 글이란 해도 될 부분과 안해야 할 부분이 있는 법이라구. 뭐든 넘치면 망가지듯, 글도 지나치게 의욕이 과잉일 땐 그 글 자체가 깨져버려. 물을 지나치게 많이 담은 질그릇처럼.”

회장은 글이 든 종이를 흔들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알아듣겠어? 네 글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당히 조절하고 꾸밀 ‘절제’와 남을 고급스럽게 감동시킬 ‘품격’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한 마디로 ‘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의 나열일 뿐이야. 이렇게 무질서한 단상 만으론 ‘글’이 안 돼!”

그녀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래도 처음 쓴 글인데, 정말 기쁘게 썼던 글인데 칭찬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렵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회장의 독설이 너무 통렬한 탓이었다.

그녀도 창작론 하나는 통달할 정도로 외운 처지였다. 회장의 말이 ‘진짜’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당연한 상식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녀 글이 많이, 아주 많이 못 미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그녀의 ‘첫’ 작품이다. 첫 아기나 다름 없었다. 그런 귀한 물건을 저렇게 매도하고 내 팽개쳐 버리다니. 

그녀는 문득 이 자리를 뛰쳐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야 글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저 회장의 마음에 드는 글 따위 쓸 수도 없을 거고 그런 비위 맞추는 글 쓰러 이런 모임에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나갈까 망설이고 있을 때, 회장은 다른 여자 동기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와는 반대로 회장의 찬사가 터져나왔다.

“괜찮네. 처음치곤 잘 썼어. 너희들, 이것 좀 보라구. 문장이란 어휘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거기에 절제를 통해 문장을 ‘적당한’ 선에서 조절하지. 품격이 깃들이면 읽는 이를 감동시킬 수 있구. 근데 이 신입생 좀 봐. 아직 몇 부분은 미흡하지만, 어휘 선택, 특히 ‘품격’면에서 아주 좋아. 다들 본받아. 알겠어?”

그녀는 동기의 글을 읽었다.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회장 말대로 동기의 글은 뭔가 유려하고 찬란할 정도로 풍부하며 생소한 어휘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기의 글에 뭔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기의 글에는 그녀가 옛날 시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없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도 없었다. 진심이 깃들어 있지 않고 잘 꾸며쓴 예쁜 포장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회장을, 그리고 함박 웃음을 터뜨리며 자기 글을 설명하는 동기를 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 사람들을 내 글로 감동시켜 보겠어.’

그녀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글내음’에 남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는 초보였고 아직 배울 게 많았다.

그 날의 모임은 그렇게 끝났다. 그녀는 그 날 이후 글내음 모임에 꼬박꼬박 나가는 ‘동아리 회원’이 되었다. 어떤 모임이든 그렇지만 가끔 들르거나 조금 나오다 마는 회원들과 ‘정식 회원’을 구분한다. 특별한 의식이나 환영회를 통해서.
얼마쯤 후 그녀와 그때 그 동기를 비롯한 새내기들도 ‘글내음’의 신입생 환영회로 불려나갔다. 이제 정식 환영회를 거쳐 정식으로 글내음 회원으로 입회하는 거였다. 엉뚱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그녀 역시 글내음에 계속 머무를 작정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식 신입생 환영회는 자그마한 술집에서 이루어졌다. 간소하되 초라하지 않고, 풍성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주연을 목표로 한다며 회장이 끌고 간 거였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술집의 이름은 ‘현명한 주점 주인의 주점’이었다. 

그녀는 술집을 둘러보며 주인이 현명한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산뜻한 사람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부 장식, 정돈 상태, 그리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하는 분위기까지도 마음에 들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상하게 술이 잘 사라진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와 처음 술잔에 입을 댓고 그리 많이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이곳, 이 분위기에선 그녀도 이야기, 시와 소설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술의 취기는 시흥을 부르고 시흥은 다시 술을 불렀다. 서로 논쟁을 하면서도 금방 풀어지고 다시 술잔을 서로 높이 드는 자리였다. 

회장은 이날도 신입생을 환영한다면서 몇 마디 한 후 자신의 문학론에 열중했다. 몇몇 동기, 선배들이 그 이야기를 듣거나 토론했다. 그녀도 가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옆 자리의 ‘동기’와 말을 텄다.
회장의 칭찬을 받은 유일한 여자 동기. 별로 다가서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술 기운은 그녀의 거부감을 옅게 만들었고 그 동기와 말을 트게 만들어줬다. 그녀들은 금새 친구가 되었다. 술에, 분위기에, 문학에 취해서. 

동기와 그녀는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을 때, 모임이 잠깐 한산해질 때였다. 그녀가 홀로 앉아 술잔을 홀짝이는 데 옆에서 잔을 채워주는 손이 있었다. 

“아, 고마워요. 어?”

그녀가 감사 인사를 한 사람은 부회장이었다. 부회장은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표정이었다. 

“난 나쁘다고 생각 안 해. 솔직한 거 말야.”

난데없는 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회장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데 명수인 것 같았다. 그녀는 술잔을 홀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벌써 여덟잔 째다.

“무슨 말이세요?”
“네 글 말야. 모르겠어?”

그녀의 글. 술 기운에 풀어져 있던 그녀 마음이 한 순간에 당겨졌다. 그녀의 글. 회장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글. 그녀 자신 조차 자신 없었던 글. 처음 썼기에 부끄럽고, 그 이전에 너무나도 귀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첫 번째 작품’.

그런 글을 부회장이 칭찬한 것이다.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들였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례한데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저 사람이.
부회장이 말했다.

“넌 말이야. 네 진실을 자연스레 토로했어. 난 그 글 읽으며 솔직히 놀랐다구. 그렇게 솔직하게 쓴다는 거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 하지만 원래 글이란 그래야 해. 네 글이 그랬지.”

글이 그래야 한다. 부회장의 말은 글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걸까. 솔직해야 한다는 걸까. 둘 다 일까.
그녀는 어느새 부회장 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부회장은 연신 싱글대며 잔을 비웠다.

“글은 말이지. 곧 사람이야. 모든 예술은 곧 ‘자기’ 발현이라구. 음악, 미술, 심지어는 영상 예술까지도. 모두 자기 개성을 보이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솔직하게 남 앞에 드러내는 거야. 자기가 누구라고 이 세상에 외치는 거라구. 글도 그래. 그리고 네 글이 그랬어.”

부회장이 잔을 온전히 비웠다. 그녀도 비웠다. 

“정말 강렬했지.”

그녀는 그후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한 건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그녀의 침대 위에서 원고지를 품에 안고 있었다는 거였다. 
그녀의 ‘첫 글’이 쓰여진 원고지를. 

그 날 이후 그녀는 부회장과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를 칭찬해서만이 아니라, 부회장의 생각에 공감해서였다. 부회장처럼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회장의 생각은 곧 그녀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글은 곧 사람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매번 깨지면서도 글을 써 갔다. 회장은 연신 비판했고 부회장은 그 자리에선 가만히 있다가 뒤에서 위로해주곤 했다. 그녀는 그 위로에 힘을 얻어 글을 계속 썼다. 연필로. 그녀 자신의 온전한 이야기를.

언젠가 부터였을까. 그녀가 글을 쓰다 말고 글이 쓰여진 원고지를 품에 안는 버릇이 생긴 게. 그녀는 글을 쓰다 말고 갑자기 원고지를 꼭 끌어안곤 했다. 글이, 그녀가 쓴 글이, 그녀가 만든 작품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그녀가 지금은 그녀가 쓴 글을 안을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했다. 

그럴 때면 불현듯 부회장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랐다. 이런 생활을,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부회장. 그녀는 부회장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중얼거리곤 했다.

“그냥 고마운 거지 좋아하는 건 아냐. 내가 좋아하는 건 글이라구.”

그럴 때쯤 전화가 온다. 

“나야.”

부회장이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뛰쳐나가곤 했다. 언제나처럼.

그녀와 부회장은 글내음의 공식 모임에선 서로 대화하는 걸 삼갔다. 하지만 사람의 눈과 귀란 무서운 것. 그녀와 부회장이 자주 붙어다닌 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동기가 묻기도 했다.

“너, 연애하니?”

그녀는 부정했다.

“아냐. 그런 통속적인 거 아냐.”

문학을 즐기는 소녀들은 ‘연애’라는 단어에 대해 보통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환상. 또 다른 하나는 경멸. 

그녀는 후자에 속했다. 그녀는 통속적인 연애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건 다 거짓이라 여겼다. 그녀와 부회장간의 관계는 더 높은 ‘무엇’이라 믿었다. 물론 그렇거나 말거나 남들이 보기엔 그녀가 하는 것도 ‘통속적인’ 연애였지만.

당시 그녀의 하루하루는 나날이 생기와 윤기가 감돌았다. 하루하루 길을 걷는 것조차 즐거웠다. 주위의 모든 게 지독할 정도로 생생히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인간이 곧 글이라면 인간이 사는 삶도 글에 반영된다. 그녀의 글도 변했다. 그 전까지 그녀의 글은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날카로웠다. 삶이 아닌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그녀이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삶 자체가 즐거웠다. 자연 글도 밝아지고 부드럽게 되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흘렀다. 글내음의 정기 모임 때마다 모인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서로 장, 단점을 지적하며 토론했다. 요 근래에는 주로 그녀와 ‘동기’ 글이 주된 대상이었다. 서로 대조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회장이 나섰다. 회장이 쓴 글을 직접 들려주겠다는 거였다. 회원들은 저마다 기대를 품고 모여들었다. 회장이 직접 발표하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라 했다. 그녀도 글내음에 들어온 지 석 달여 동안 회장의 글은 본 적이 없었다.

작은 공간에 원형으로 의자가 둘러쳐졌다. 사람들이 그 의자에 빙 둘러앉고 그 중심에 발표자가 들어섰다. 평소엔 늘 그녀나 동기였지만, 오늘만은 회장이었다.
회장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술을 뗐다. 

“요즘 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본보기를 보여주려 써왔지.”

순간 그녀와 회장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지목한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곤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얼마나 잘나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듣고 싶었다.
낭랑한 목소리로 회장의 시가 읊어졌다.

“노래는 덧없는 것이라 영원하지 못하네. 그러나 우리는 부르지. 우리를 위한 노래를…….”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나하나가 멋진 경구고 글귀였다. 누군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낮게 탄성을 뱉었다. 미사여구를, 꾸밈을 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회장의 글은, 회장이 늘 주장하던 데로 절제와 품격을 갖춘 글이었다. 

그녀 또한 글 꾸밈을 이렇게까지 뛰어나게 할 줄 예상도 하지 못했다. 평소엔 미려하다고 은근히 자부했을 동기조차 멍하게 앉아 들을 뿐이었다. 모두가 멍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오직 단 하나, 그녀만을 제외하고는.

회장이 낭독을 마쳤다. 회장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감탄한 얼굴이었다. 감탄 탓에 되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만 뺀다면.
그녀와 회장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회장이었다.

“뭘 느꼈지?”

회장이 원한 답은 ‘이게 진짜 글이군요’ 정도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답은 달랐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답했다.

“텅 비었어요.”
모두가 놀랐다. 회장은 더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말을 뒤집을 생각이 없었다. 

“텅 비었다고? 무슨 소리야. 내 글을 듣고도 그런 말이 나와?”

회장이 얼굴을 찡그린 채 다그쳤다. 그러나 그녀도 단호했다. 

“뭐라 말해도 마찬가지예요. 선배 글은 예뻐요. 화려해요. 품격도 있어요. 하지만 그 글은 텅 비었어요. 속에 아무것도 없어요.”
“비었다니, 대체 뭐가 비었다는 거야?”

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낭독을 들으며 계속 생각했던 바를 뱉었다.

“선배 글엔 선배가 없어요. 단지 예쁜 장식만 있을 뿐이죠.”

회장의 글은 회장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시를 읊으며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그 사실이 명확했다. 분명 회장은 스스로 말한 대로 ‘절제’하고 ‘품격’높은 글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가장 중요한 핵심, ‘회장 자신의 모습과 생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예쁜 글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회장은 발끈했다. 회장의 생각은 또 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말 대로라면, 모든 글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해야겠군. 넌 글이 사람과 가까워야 된다고 생각해? 아니야. 글은 사람과 일정부분 떨어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추한’ 모습을 역겹게 드러낼 뿐이라구.”
“추하다구요?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따지고 들었다. 글이 왜 사람과 떨어져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네 글처럼!”

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 얼굴의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른 회원들이 슬슬 둘을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네 글, 정말 너와 가깝지. 읽으면 어떤 줄 알아? 정말 불편해. 자기 생각을, 심정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서! 글이란 공감을 자연스레 얻어야 하는데, 넌 반대야. 네 감정을 강요하지. 집요할 정도로! 그게 네가 말하는 ‘알맹이’냐? 그 강요가?”

그녀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회장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녀의 글이 그녀 자신을 드러내고 있고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글이 남에겐 강요가 되고 너무 솔직해 추하다고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녀의 입에서 기계적인 반론이 흘러나왔다.

“어쩜, 그,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글이란 곧 사람이 아니던가요? 글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예요. 설사 남들이 싫어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그녀의 평소 생각을 여과 없이 쏟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회장은 차갑게 대꾸했다.

“남이 싫어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니? 너, 대체 독자를 뭘로 보는 거야? 읽어주는 사람 없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녀의 항변이 따랐다.

“난, 나만 만족하면 돼요.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인가? 그걸 떠나 독자 없는 글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끔찍하군!”

두 사람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회장과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틀리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자리를 나서자 부회장이 다가섰다. 부회장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잘했어. 네가 옳아.”

그 말을 회장 앞에서 해줬더라면. 그녀는 원망 섞인 눈으로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부회장은 남의 기분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부회장은 티켓 두 장를 꺼내들었다. 딴에는 즐기자고 산 티켓일 터였다.

“오페라 공연이야. 보러 가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회장과 함께 연주회를 가야 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도 풀지 못한 채로.
그녀는 좀더 회장의 말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특히 그녀가 남들에게 감상을 ‘강요’한다는 거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솔직한 건 아닐까. 아직 기예가 모자라서 그런 걸까. 그 부분을 글을 쓰며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부회장이 한 번 스케쥴을 잡으면, 그녀는 거기에 따라야 했다. 그녀 스스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시간도 빼앗긴 채였다. 특히 글 쓰는 데 그건 치명적이었다. 글은 짬이 난다고 틈틈이 써지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그녀의 경우엔 앉아서 적당히 사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 시간이 없었다. 
부회장의 정해진 ‘스케쥴’ 때문에.

그녀는 이 점이 불만스러웠다. 부회장은 여전히 좋았다. 얼굴만 봐도 그날 기분이 산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글쓰는 재미를 깨닫고 한창 쓰는 와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글쓸 여가가 없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부딪치는 날이 찾아왔다. 이제 여름에 접어들어 날씨도 더워지고 도시 매미들이 시끄러운 6월이었다. 그녀는 매미소리를 듣다 시상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떠오르는 시상을 글로 옮기려 했다. 

연필을 움직이려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경쾌한 72화음. 하지만 그녀 기분은 전혀 경쾌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시상이 벨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짜증난 기분으로 전화를 펼쳤다. 

“나야.”

부회장이었다. 언제나처럼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탁한 목소리. 평소라면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실로 황홀한 저녁밤이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뭔가가 속에서 바글바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는지 부회장이 재촉하듯 말했다.

“나와. 빨리.”

그녀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나중에, 내일이나 모레 봐요.”

그녀의 생각으론 이건 꽤 잘 참아낸 거였다. 그러나 부회장은 전혀, 배려나 이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말이야? 나오랄 때 나와.”

그녀는 다시 한 번 말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답했다. 

“오늘은 피곤해요. 내일 만나요.”

부회장은 물러선다는 단어도 몰랐다. 

“나와. 지금 당장.”

그녀는 순간적으로 마음 속의 유리창이 깨어졌다고 느꼈다.

“그쯤 해둬요! 내가 선배 종이예요? 나오란다고 다 나가게!”

쏜 순간 조금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부회장은 버럭 고함을 질렀고 그녀는 그녀대로 맞섰다. 부회장과 그녀 사이에서 언성높은 언쟁이 벌어졌다. 둘은 서로에게 지금껏 쌓았던 분을 다 토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시원했다. 처음에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후회가 도는 것을 느꼈다. 이미 그녀가 쓰려던 글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녀가 화를 낸 이상 부회장과 다시 만나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다.

조금쯤 참았더라면, 관계가 파탄나버리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녀를 늘 지지해주는 사람은 그래도 부회장 밖에 없었다. 그녀와 생각이 같은 사람도. 

모든 게 밝았던 기분도, 뭔가 해보려던 시간과 느낌도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의욕 상실이었다. 겪게 되는 모든 일이 회색빛으로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아졌다. 그녀는 그때서야 그녀가 부회장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하나의 모임 내에서 커플은 늘 주목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커플이 잘 되고 있을 때보다 위기에 빠졌을 때 더 민감하게 포착해낸다. 잘 사귀고 있는 것 보다는 위기에 빠진 커플이 더 재미있게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와 부회장의 경우도 그랬다. 그녀는 별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남들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 ‘동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힘 없어 보여. 무슨 일 있어?”

흔한 한 마디. 그러나 그녀에겐 꼭 필요했던 한 마디였다. 본래 여성에게는 격려보다 공감을 느낄 수 있는 한 마디가 더 중요하다. 특히 ‘문장 하나’에 민감한 ‘문학 소녀’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금방 동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응. 사실은…….”

그녀는 누구에게든 지금의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매사에 의욕이 사라지고 ,자연히 글도 더 이상 쓰기 어렵게 되고, 답답해 까무러칠 지경인 상황에 대해. 그녀의 ‘동기’는 생각외로 적당한 상대였다.
글쓰는 스타일은 틀렸지만, 그녀의 ‘동기’와 그녀는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적어도 ‘글’이 나오지 않는 데 대해 고민스럽다고 말할 사람은 동기 정도 밖에 없었다. 글쓰는 이를 제외하고 그 누가 글씀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동기’와 늘 길을 같이 걷게 되었다. 동기는 부회장보다 편안했고 한결 마음이 맞는 친구였다. 부회장을 만날 때의 두근거림은 없었지만. 

그때는 그녀도 이유를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혼자 다닐 때면 마음이 어딘가 텅빈 것처럼 허전하곤 했다. 그 때는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멀어져 버린 탓이라는 걸 몰라던 거였다. 
부회장과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나날아 계속되었다. 먼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게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엔 그녀의 뿌리 모를 자존심이 너무 셌다.
그래도 역시 부회장의 빈 터는 너무 컸다. 그 빈터를 느낄 때면 가슴이 아파와 견딜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온전히 심장 한 구석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견디다 견디다 못 견딜 때면 그녀는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소연은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와 대화해 가슴이 텅 빈 느낌을 잊고 싶었다.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공허함은 대화로 채우고 싶었다. 만약 취미 많은 여자들이었다면 가벼운 오락거리라든가, 쇼핑, 하다못해 십자수라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런 취미가 없었다. 단지 책과 글이 있을 뿐.
‘동기’는 그녀에게 말했다.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

그녀는 한숨쉬며 고개를 젓곤 했다. 
그녀도 전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필을 들 때마다 그녀 머릿속에는 부회장의 이유없는 자신감 넘친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결국 그녀에게 글을 쓰게 만든 건 부회장이었으니까. 그녀는 그 때마다 가슴 한 켠을 잃어버린 느낌에 시달렸다. 온몸을 웅크리고 호흡을 가다듬어도 사라지자 않는 공허감. 그런 상황에선 아무리 그녀라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동기’는 이해한 듯 했다. ‘동기’는 그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함께 대화하거나 같이 걸어가주곤 했다. 그녀는 그 덕에 약간은, 아주 약간은 공허감을 잊곤 했다. 그때까지는 아직 정확히 이유를 모르던 공허감을. 

시간이 흐르고 상처도 무뎌졌다. 그녀는 이제 다시 부회장과 말을 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조금 숙이고 들어가면 될 일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날은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그녀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쓸 때마다 즐겁던 ‘글쓰기’를.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하루는 ‘동기’없이 간만에 교정의 길을 그녀가 걸었다. 문득 그런 그녀에게 글내음 안의 다른 동기생이 따라왔다. 그 동기는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걔’는 어디갔어?”

그녀는 오늘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답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동기생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너, 요즘 걔랑 잘 안 지내지. 안 그래?”

사실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그녀 머릿속을 스쳤다. 대체 이 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다른 동기생이 말했다. 

“나 말야. 아까 걔가 부회장이랑 같이 있는 거 봤어.”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 이럴 때 보통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아프거나 정신 없지는 않았다. 단지 ‘멍’할 뿐이었다. 

다른 동기생은 고개만 끄덕이더니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같이 있기만 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답을 준 건 다른 동기생이었다.

“어딘지 안내해 줄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봐야했다. 보지 않은 일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 다른 동기생을 따라갔다. 

아름다운, 또는 열정적인 여름의 한 낮이었다. 새파란 나뭇잎들이 생명 그 자체로 약동하고 있었다. 햇빛이 세상 모든 것을 하얗게 드러내고 사람들도 자기 속살을 백주하에 보기좋게 드러냈다.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에 장난치는 애들마저 신나 보였다. 

그런 여름날, 더 없이 우거져 더 이상 늘어질 데도 없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녀는 그 광경을 보았다. 부회장과 동기가 입맞추는 장면.
거기까진 다른 동기생도 예측 못했던 듯, 놀란 소리를 뱉었다. 그 서슬에 부히장과 동기가 이쪽을 보았다. 순간 시선이 얽혔다. 그녀와 부회장, 그리고 동기. 동기와 부회장의 얼굴은 수십 차례 변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동기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이건…….”

문득 그녀의 표정 없는 얼굴 위로 물방울 한 줄기가 흘렀다. 동기는 입을 다물었다 부회장이 소리질렀다.

“야, 오해마! 이건!”

그러나 부회장은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잃었다. 그녀가 돌아서서 어디론가로 뛰어가 버렸기에. 어디로 뛰려고 뛰었는지 그녀는 이후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녀 앞에는 원고지, 그리고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개의 물건을 잡았다. 그녀의 머리를 지배하는 건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단지 그녀는 쓰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무엇이라도.

연필이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그녀 마음속에서부터 뭔가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꾸며쓰려 해봐도 잘 되지 않던 시가 단 한 순간에 종이를 매웠다. 

사흘 후, 그녀는 글내음에 들어섰다. 
글내음의 정기 모임을 위해서였다. 이미 햇볕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어떤 이는 놀랐고, 어떤 이는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재빠르게 다른 쪽을 향했다. 그녀 역시 그쪽을 보았다. 동기, 그리고 부회장.

그녀는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단지 그녀와 동기, 부회장을 유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침묵을 깨버린 것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뭐야, 손에 든 건?”

회장이었다. 회장은 여전히 쏘는 듯한 말투와 쏘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대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안심되는 걸 느꼈다. 회장만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이가 그녀 앞에서 변했어도.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이 전혀 안 맞는 사람 덕분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가 말했다.

“새 글이예요. 시죠.”

어떤 이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남자를 친구에게 빼앗긴 이 상황에서 글이라니. 어떤 이는 감탄스런 표정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글을 쓰네. 어떤 이는 어리둥절해 했다. 
웬 새 글?
그러나 회장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이렇게만 말했다.

“그래? 그럼 읊어봐. 들어는 줄 테니까.”

그녀의 손이 조용히 종이를 치켜세웠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단지 동기와 부회장은 슬쩍 그녀를 훔쳐볼 뿐 정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씁쓸히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글을, 시를 읊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홀로 걷지.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의 길을…….”

이것은 그녀의 이야기, 노래, 마음. 그녀는 모든 것을 담아 읊었다. 그녀 자신의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단어 하나, 음절 하나에도 그녀의 심정과 생각이 절절히 스며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그녀의 시가 베어 나오는 것 같았다. 

서먹서먹한 표정으로 시를 듣던 ‘글내음’ 사람들의 얼굴이 차츰 변해갔다. 그들의 얼굴은 그녀로선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자신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지도 몰랐다. 어떤 의미에서든 간에 이 공간, 이 시의 공간, 이 시가 지배하는 이 공간 속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있었다. 심지어는 시를 읽는 그녀조차도.

그 날 사람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던 게 대체 뭐였을까. 시일까. 그녀의 목소리일까. 분위기 그 자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시가 만들어낸 단 한 순간의 ‘공감’ 이었을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녀는 시 낭독을 그치고 있었다. 

“……생에서, 수 없는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없네. 나는 배우지 못하리. 그 말을.”

낭독이 끝났다. 사람들이 눈을 깜박였다. 그들은 잃었던 넋을 되찾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침묵의 시간이 너무나도 성스러워 깰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회장이었다. 

“제법 잘 썼네.”

그녀는 회장을 보았다. 회장은 심술궂츤 얼굴로 제약을 달았다.

“자기 감정이 넘치는 글 치곤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잘 썼어! 정말 멋진 시였어!”
“그런 시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이거 뭡니까! 나빠요. 이런 시를 숨기고 있었다니!”
“너가 쓴 거 맞아, 정말?”

문득 누군가가 그녀 어깨를 잡았다. 익숙한 손길. 부회장이었다. 

“역시 너 다워. 난 네가 그런 시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전부터 생각했었어!”

약간은 뻔뻔스러운 소리. 하지만 부회장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에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수줍게 미소지어 보여다.
그녀가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그녀는 동기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나갔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다시 그녀와 부회장은 함께 걷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다.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한 번 헤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합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경우 뿐이다. 그들이 헤어진 이유가 고쳐졌을 때. 

하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부회장은 더욱 그랬다. 둘 사이가 다시 멀어지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부회장은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자기중심적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피곤했다. 다른 것보다도 변하지 않는 그가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만날 때마다 설레임이 앞섰지만, 지금은 조바심이 앞섰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대화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녀로선 황당한 반응이었다.

“날 구속하려 들지마. 그런 태도, 지겹다.”

그녀는 그 말에 단 한 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다. 그녀의 태도가 그렇게 느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누가 누굴 구속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녀는 부회장에게 늘 얽매여 살아왔다. 그녀가 글내음에 들어선 것도 부회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시를 쓴 것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늘 부회장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회장은 지금 그녀가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녹슬고 낡아 거치적거리는 쇠사슬처럼.

“난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내가 원하는 대로 글을 써왔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그런데 넌.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걸 정말 싫어하지. 직접 드러내진 않지만 늘 느껴져. 답답할 정도로! 은근한 짜증이 내 주변을 늘 뒤덮고 있어. 너 때문에! 그게 얼마나 지겨운 건지 알기나 해?”

그녀는 단지 약간의 불만을 품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겨욱 그걸 갖고 부회장은 답답함과 지겨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때 몰랐다. 남자들은 원래 여자들보다 훨씬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참는 기준이 아예 다르다는 사실도.

“나도 왠만하면 참으려 했어! 참아왔고.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네 글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저번에도 네 시는 정말 감동적이었지. 네 말대로 글은 사람. 그래서 돌아갔다. 네게! 나 좋다는 애 버리고!”

뻔뻔스러운 소리도 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소리기도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 받아야 할 쪽은 그녀였음에도.
그랬기에 그녀는 그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시 이거군. 난 네 틀 안에 가두려 하는 건가? 네 방식대로 길들이려 하면서! 집어치워. 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런 식으로 살 생각 없어!”

그녀는 부회장과 그 자리에서 다시 헤어졌다. 더 이상 돌이킬 수도 돌이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그길로 자취하던 집 안에 틀어박혔다. 사각으로 된 좁고 어두운 공간 속만이 그녀가 가야 할 곳 같았다. 모든 의욕이 봄날의 햇살처럼 흔적 없이 사그라 들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손쉽게 사라지는 그 햇살처럼. 

그녀가 그랬다. 그녀는 부회장과의 관계가, 이전처럼은 아니더라도 다시 유지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부회장이 원하는 글을 쓰며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녀는 행복 대신 방 안에 틀어박혔고, 글을 쓰는 대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밤이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자주 만날 때보다 갑자기 사라졌을 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아마도 갑작스레 회장이 찾아온 것도 사람들의 그런 이상한 심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멍하게 앉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낸 지 세 번째 되는 날, 그녀가 열지 않은 문이 열리고 여자 하나가 들어섰다. 언제나 불만과 날카로움이 어려 있는 얼굴. 그 누구도 그 여자 앞에선 무사히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회장이었다.

회장은 들어서더니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인사를 할 힘도 없어 망연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회장과 그녀는 한참동안을 기이한 침묵 속에서 보냈다. 문득 회장이 고개를 흔들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회장도 떠난다고만 여겼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그러나 잠시 후 회장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의 손에서 물품들이 던져졌다. 빵, 우유, 공책. 그녀는 의아한 기분으로 고개를 힘없이 들었다. 그녀에게 회장이 한 마디, 더도 덜도 말고 단 한 마디를 쏘아 붙였다.

“먹고 써!”

그녀는 일어나 회장을 붙잡으려 했다. 도와줄 필요 없었다. 이대로 주을 생각이었다. 이런 도움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렀다.

“회장…….”

순간 격렬하고 무시무시한 답이 돌아왔다.

“닥쳐! 한심해서 못 봐주겠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남자 하나 때문에 네 가능성 다 죽일 거야? 좀 많이, 아주 많이 미숙하지만 그런 시를 쓸 수 있는 네가 말이야! 무엇보다도, 너, 너가 안 쓰고 견딜 수나 있을 거 같아!”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글. 글. 글. 


회장은 나갔고 그녀는 망연히 앉아 공책을 보았다. 그녀의 입속에서 회장의 말이 곱씹어졌다. 글이라. 불현듯 그녀는 글이 그리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부회장이 배신했던 그 절망의 순간에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를 낭독하면서 구원받았다. 지금의 이 절망도 글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회장의 말대로 먹고 공책을 들었다. 쓸 생각이었다. 머리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절망을. 고독을. 망연함을. 그녀의 펜이 사르르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뭘 써야하지?’

그녀의 펜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옛날처럼. 처음 글, 자기 이야기를 쓰려 했던 그 때처럼. 차이가 있다면 그 때는 결국 써냈지만, 지금은 쓸 수가 없다는 거였다. 

갑작스럽게 왔다 떠난 연정의 파문과 마찬가지로, 글 역시 그녀를 처참하게 떠나버렸다. 그 날, 처음으로 글을 쓴 날 글은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찾아왔다. 글은 이 반년 간 그녀와 함께하며 많은 것을 경험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글은 갑작스레 그녀를 떠나버렸다. 그녀가 반했던 싯귀와는 정 반대로, ‘어느 날 갑자기 글이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망연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부회장이 떠난 것 이상의 망연함이었다. 

“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대부분의 문학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그녀 자신의 말에 쉽게 구속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몇 주가 지난 후, 그녀는 ‘글내음’의 동아리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수줍은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정된 분위기의 모습이었다. 그녀를 본 글내음의 선배, 동기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리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부회장과 ‘동기’, 그녀 사이에서 일어난 소음은 글내음처럼 작은 동아리를 울리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셋 다 모임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부회장도 더 이상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게 상처입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도착과 함께 다시 ‘일상적인’ 글내음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시와 소설, 수필을 읽었고 가끔씩 자기 글을 들고 와 합동평가회를 했다. 이따금 가혹하게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런 그 정도에 상처받을 이들은 이미 문학회를 떠났고, 남은 이들은 오히려 격렬하게 반박하거나 때로는 비난을 수긍하며 자기 작품을 수정했다. 

이른바 글의 향연. 그랬다. 
글내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글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글내음의 회원들은 글을 읽고, 쓰고, 평가하는 데 미쳐 있었다. 밖의 사람들은 이미 잊어버린 일이지만 그들은 아직도 글을 붙잡은 채 글의 내음에 도취되어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물론 그 차갑고 음습한 동방이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동방은 여전히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전등 아래의 공간이었다. 안의 사람들도 그를 닮아 말없이 냉랭하게 책을 읽고 있기 일수였다. 그러다 한 순간, 누군가 글을 써오기라도 하면 서로 냉랭하게 비난하고 상처를 입히곤 했다. 그녀가 처음 글내음에 발을 디밀던 그 순간처럼.

변한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글내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글내음의 생활을 보다 넓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부회장이나 그녀 자신이 쓸 글에 대해서만 신경쓰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지금, 그녀는 보다 넓게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렇기에 처음에는 아무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더 적극적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회원들마저 있었다.
문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회장이었다. 회장은 어느 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글을 안 써오지?”

글의 향연에서 메인 디시는 세 가지. 
읽을 글, 쓸 글, 평가할 글. 
그녀는 이 중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요근래 회장과 논쟁하는 일도 없었다. 당연한 일. 자신이 글을 쓰지 않는데 어떻게 회장에게 반박할 수 있을까.
실은 그녀는 하나도 의욕이 없었다. 아니, 재미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터였다. 남의 글을 읽고 평가하기만 하는 일은 역시 답답했다.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모든 평가의 기본은 이거다. 그런데 그녀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답답함, 막막함이 쌓여만 갔다. 이미 그녀는 글쓰는 맛을 알아버린 미식가였다. 글의 향연에서 가장 중요한 요리 ‘글쓰기’를 못하는 상황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차츰 활발했던 그녀의 활동도 잦아들었다. 그녀는 쓰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 떠난 글은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답답했고, 막막한 시간과 하루하루를 벗삼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비정하고 무심한 것. 답답한 시간이라도 결국은 흐른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시일을 보내는 동안 시간과 계절이 흘렀다. 어느새 붉은 비의 계절, 가을이 된 것이다.

굳이 장식하지 않더라도 가을의 도시는 화려하다. 붉고 노란 잎사귀가 찬연히 그 생명을 소진시키며 빛나기에. 이런 때, 사람들은 좀더 길가를 걷게 된다. 왠지 모를 여유로움과 쓸쓸함이 뒤섞인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그녀 역시 가을 거리를 걸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오밀조밀하게 잘 배치된 도시의 가로수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곤 했다. 은행이 바람을 타고 노란 시내를 이루고, 단풍이 돌바닥일 뿐일 무채색의 인도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거리에서 ‘끔직함’을 느꼈다.

바스락.

그녀의 발에 낙엽이 밟힐 때마다 나는 소리. 이미 생명의 초록빛을 잃고 떨어져 바스라지는 잎의 소리. 그녀의 눈앞에 쏟아진 낙엽의 더미. 그녀는 그 더미가 마치 시체들의 산인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지금 이파리의 시체를 밟고 있었다. 그 시체들은 이미 모든 수분과 생기를 빼앗겨바스라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그녀처럼. 

깨달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지금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시간의 나날이었다. 그녀의 모든 시작은 글이어다. 그리고 그 글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체와 다른 게 있다면, 숨을 쉰다는 것. 그것 뿐. 그녀는 한 조각의 낙엽을 밟으며 소리를 들었다. 바스락. 바스락.

“차라리 이 소리는 가치있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생.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삶. 살 필요도 의미도 없는 삶. 그녀의 눈이 파뜩 뜨였다. 나뭇잎이 바스라지는 소리는 차라리 가치있다. 그렇다면 낙엽과 같은 그녀 역시 죽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머리 속에 삽시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늘 푸르기만 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화려하게 져버리는 낙엽처럼. 사람들의 발에 밟혀 바스라지면서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는 낙엽처럼. 그녀 역시 죽어야 이 지독한 기분과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시체는 시체다워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글을 쓰지 못하는 시체였다.

죽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녀는 곧바로 자취 집으로 들어섰다. 먼저 유서를 남길 생각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일들. 생의 무의미성을 시원히 털고 저 먼곳으로 가고 싶었다. 종이를 들고 평소처럼 펜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깨달아야 했다. 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서도 글이다.
그녀는 단 하나의 획도 긋지 못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뭔가를 쓰려 하면 갑작스럽게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난독증은 아니니 난작증이라도 되는 걸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유서는 포기다. 그녀의 죽음은 아무런 글 없는 죽음이 될 것이다. 그녀는 죽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면 된다. 이 삭막한 도시에서 죽음은 너무나 쉬운 게다. 

막 계단을 오르려던 그녀의 눈에 떨어지려는 낙엽 하나가 들어왔다. 길 저편, 나무 끝자락에 붙어 떨어질락 말락 하는 나뭇잎. 그녀의 머릿속에 저 유명한 <마지막 잎새>가 떠오른 것은 결코 괜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잠깐 동안 망설이다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 편 멀리에 있는 나뭇잎을 향해서.

그녀가 걷는 길은 학교 근처의 샛길. 낯익은 얼굴도, 지형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그 나뭇잎만을 보며 걸었다. 잎새의 주인공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 죽겠다고 했었다. 그녀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열렬한 문학소녀들이 소설의 삶을 모방하려 하는 것처럼. 

비록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글과 함께 죽는 게 더 역시 멋지지 않을까. 그녀는 그래서 걸었다. 그 곳까지. 

그러나 가을길, 그것도 학교 근처의 호드라진 낙엽으로 유명한 독특한 샛길을 걷고 싶어하는 여자는 그녀 만이 아니었다. 문학을 즐기는 소녀라면 응당 가을 낙엽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는 않더라도 센티한 감정에 빠지곤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게다. 하필 이날, 이때, 이 장소에서 ‘회장’과 마주친 것은.

“아!”

두 사람은 서로 탄성을 질렀다. 서로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 못해서였을까. 그녀는 회장을 보았다. 만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그 여자. 독설과 논쟁으로 보냈던 회장과의 시간. 무엇보다도 그녀와 전혀 맞지 않았던 회장.

이상했다. 회장의 얼굴엔 그 질릴 정도로 날카로웠던 기색이 없었다. 그 이전에, 그녀에게 회장은 기이할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글내음에 들어서면서 만났던 세 사람. 그 중 남은 이는 회장 밖에 없었다.

문득 그녀에게 이상한 느낌이 와닿았다. 회장도 떠나게 되는 걸까, 그녀에게서. 그녀는 웃음을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기로 결심한 마당이다. 그럼 어떻고 저럼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회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녀 때문에 부회장과 ‘동기’, 그리고 그녀까지 잃게 될 일인지도 모른다.
회장과 그녀는 서로 말 없이 마주 보았다. 그녀의 생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회장이었다. 

“낙엽 구경하러 나왔니?”

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회장은 당연하다는 듯 몸을 돌려 그녀와 발걸음을 같이 했다.

“걷자.”

그녀와 회장은 낙엽의 시체 사이를 거닐기 시작했다. 침묵.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 말을 꺼낸 것은 이번에도 회장이었다. 

“요즘 안 보이더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단지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그녀로선 더 이상 글내음을 나갈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었고, 그 이유는 회장도 알고 있을 테니까.
글을 쓸 수 없다는 이유. 

회장도 그 말 없는 답을 알고 있었는지 더 묻지는 않았다. 가을 바람이 스치고 은행잎 한 조각이 회장의 어깨에 살짝 앉았다. 그 어깨는 좁아보였다. 언제부터 회장이 저렇게 어깨를 좁히고 다녔는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회장은 은행잎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바스라지는 소리와 말은 동시에 공기 중을 흘렀다. 

“글은 말이지.”

글? 그녀는 의외의 말에 슬쩍 눈길을 돌렸다. 히장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엿보였다. 그리고 회장은 그 망설임을 입으로 쏟아냈다. 몇 차례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네 말처럼 정말 솔직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회장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어떤 고함보다도 더 크게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솔직하게. 그녀가 글을 글내음에 발표할 때마다 하던 소리. 글을 처음 선 보였을 때부터 회장이 비난하던 소리. 그리고 정작 그녀는 잊어버린 소리. 그 소리가 회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정작 회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레 말했다.

“난 충격을 받았었지.”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물었다. 그런 열정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여긴 그녀였음에도, 그런 거 관심 없다고 생각한 그녀 였건만 그녀는 물었고 회장은 답했다.

“언제요?”
“그 때. 네 시를 처음 들었던 그 때.”

시를 쓴 적이 그전에도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회장이 들은 첫 시라면, 틀림없이 부회장과 ‘동기’를 본 그날 쓴 시. 그녀는 그 때 그녀 자신의 감정, 그녀 자신을 그 시 안에 ‘토로’했다. 그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온전히 자신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지. 내 감정을 드러낸 적이. 그렇게 쓴 적도 없었지. 네 말대로 솔직한, 자연스러운 그런 글을.”
“그랬었나요.”

그녀는 돌아보았다. 그녀의 지나간 시간들을. 그녀는 정말 그랬을까. 다른 이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그렇게 진솔한, 뛰어난 글을 썼을까. 문득 회장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비밀을 속삭이는 어린 소녀의 표정이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너 몰랐지? 나, 부회장 좋아했던 거.”
“예?”

회장은 웃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마주 미소 지어 버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얼마 만에 웃었는지 떠올렸다.

‘내가 아직도 웃을 수 있어?’

감정이 살아나는 듯한 기분. 그동안 색을 잃었던 그녀의 심장에 갑자기 산뜻한 주홍빛이 더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난 도려내지 않았거든. 내 감정을. 그러고 보면 사람이 곧 글이라는 거 정말 맞는 거 같아.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글을 쓰는 사람들. 쓰는 게 생의 유일한 가치인 사람들. 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녀는 회장과 같이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왔지만 같은 곳을 걷고 있었다.
도란거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듯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빨간 단풍잎 사이로. 

“아마 난 네가 시를 썼던 그 순간, 그 순간 같은 때를 맞이해 본 적이 없을 거야. 한 번도. 그렇게 신들린 것처럼, 글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그런 거 있잖아, 그렇게 글을 써 본 적이 없어.”
“‘신들린 듯’ 이요?”
“그래. ‘신들린 듯’.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 없는, 그렇게 느껴지는 글이 있어. 너의 그 시처럼.”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신들린 듯’. 샤먼에게 신은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순간에 찾아와 버린다. 시도, 글도 마찬가지.

갑작스럽게,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듯 자연스럽게. 어느 한 순간, 그러나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어느새 알아차리게 되어 버리는.
그때 그 느낌처럼 글은 찾아와 버리는 것이다.

회장이 뭐라고 말을 건다. 그러나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문득 들어오지 않던 주변이 그녀의 눈 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런 의욕, 감각 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다르다. 죽은 것처럼, 시체처럼 느껴지던 무채색의 낙엽들에 색이 입혀진다. 귓가, 볼, 목을 만지는 부드러운 바람. 모든 것이 생생하게, 겨울의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더더욱 찬연하게 빛나는 가을. 그 가을의 빛이 그녀의 망막을 적신다.

‘어느날 갑자기, 시가 내게 찾아왔어.’

어느날 보았던 그 싯귀처럼. 어느날 갑작스레 찾아왔던 글. 그 글을 그대로 써내려가던 그 느낌. 그 글을 쓰던 순간.
그 때처럼 세상은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 자신도. 오직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찬란하도록 생생한 이 현실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

그녀는 쓰고 싶다. 이 세상을, 그녀를, 모든 것을. 

회장이 묻는 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다. 터질듯한 울림이 그녀 심장에서부터 부풀어 오른다. 뭐라도 쓰고 싶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다. 회장의 말처럼 그녀는 글을 써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 생생한 감각, 오직 글을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글을 쓸 때, 그녀는 ‘의미’ 있을 수 있다. 이 세상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빙긋 웃는다. 

“쓰고 싶어.”

어느날 글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