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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원포인트 꽁트

2. 복수자들

복수자들

 

 

이 세계는 잘못되어 있다.

하늘은 끝을 모르도록 광막하고 땅은 시야에 보이는 모든 곳이 죽어가는 풀로 가득하다. 끝을 모를 대평원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단 한 사람의 남자 뿐이다.

남자는 홀로 땅 위에 누워 망연히 하늘을 본다.

「아파! 아파! 아파!」

비명이 귓가를 파고든다. 시야는 어지러져 흔들린다. 광대한 세상 속에서 오직 감각만이 남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이 세계 속에서 남자는 홀로 버려진 존재다.

 


13년.

이 대초원을 남자가 떠돌았던 시간이며, 그때까지 남자가 가졌던 모든 관계를 버리고 떠나온 시간이다.

남자가 세계에서 버려진 이유는, 혹은 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진실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아아악! 내 팔! 내 다리!」

「네가 어떻게! 날, 날 배신해!」

스승이 제자를 죽인다.

친우는 형제와 같은 친구를 배신한다.

그리고 연인은 서로를 상잔한다.

수십,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육친을 죽이고 믿음을 배신하고 서로를 파멸시킨다.

시각, 청각, 후각.

모든 공감각으로 미친듯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남자의 눈앞에 있는 것은 광막한 하늘만이 아니다. 남자의 귀에 들리는 것은 초원을 오가는 말과 늑대의 발자국 소리만이 아니다. 남자의 후각과 피부를 적시는 것은 피비린내 섞인 초원의 바람만이 아니다.

 

바로 세계 그 자체의 모습.

겉을 덮은 피부를 벗겼을 때 새빨간 진피가 드러나는 것처럼, 세계를 덮은 가식을 한 꺼풀 벗기는 순간 세계는 참혹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는 세계의 실체를 보는 경지에 다다른 자.

곧 진신경(眞神境)의 고수였던 자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버려진 이유는, 그가 그의 온전한 세계였던 강호를 버린 이유는 세계의 본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가 강호를 버린 13년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는 수없는 세월 동안 그 모든 것을 보아왔다.

단지 그 세계의 실체가, 진실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참혹한 새빨간 실체가 남자에게 밀어 닥칠리 없다고 믿었을 뿐이다.

남자의 사매가 그를 배신하고, 믿었던 친우는 그를 질투해 죽이려 들었으며, 마침내 연인이 칼로 그의 단전을 파괴해 버리던 그 순간까지 남자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13년 전, 그 날까지는.

 

세계의 진실. 세상에서 과거에 벌어졌고, 지금 벌어지며, 미래에 실현될 참극. 화려한 포장 속에 담겨진 진정한 모습.

「이것이 진짜 세계의 모습이다!」

수십, 수백, 수천의 원령들이 외친다. 이곳에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 외친다. 이 세상 전체가 남자를 향해 외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남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백년을 정련한 내공을 잃었고, 철혈의 의지로 닦은 조직과 기반을 잃었으며, 그 오랜 세월 바쳐 이루었던 뜻도 모두 잃었다.

이는 사매를 믿고, 친우를 믿고, 연인을 믿었던 탓이 아니다.

이는 진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가다.

 

 

남자는 세상을 버렸다.

동시에 세상에서 버려졌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이 광막한 하늘만큼이나 무자비한 초원에는 오늘도 피비린내 섞인 바람이 분다. 남자가 초원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초원의 규칙은 변함이 없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두의 적이다.

-크르릉.

어스름이 깔리고 초저녁 별들이 하나, 둘 씩 뜰 무렵 그때까지 남자의 주위를 맴돌기만 하던 늑대들이 다가왔다. 남자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단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생에서 가장 큰 상실을 겪은 자에게 생에 대한 애착이 있을 리 없다.

공포가 있을 리도 없다.

늑대들이 남자의 주위를 둘러싼 채 숨을 죽인다.

한 순간, 늑대들이 뛰어들기 위해 무릎을 수축한다.

남자는 생각한다.

 

벨까?

 

세상을 버리고 쌓아온 핵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에게도 남은 것은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로서.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한은 복수로 갚는다.

강호에서 그가 배운 가장 중요한 원칙이며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유일한 철칙이다.

늑대가 물어온다면, 그도 벤다.

그때다.

-쉭!

화살 한 대.

풀썩 튕겨 오르는 늑대 한 마리.

순식간에 늑대 무리는 흩어져 초원 사방을 향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의 일이었다.

빠르고 정확한 활솜씨다.

화살의 주인은 한참 뒤에야 남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때묻고 키작은 가죽옷을 입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탐욕스러운 손으로 자신이 잡은 늑대를 채서 단검으로 찢고 살점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배를 가를 힘은 없는지 단지 잘라낼 수 있을 만큼 양껏 살점을 도려내 가져온 가죽 주머니에 넣고 허기가 졌는지 불에 그슬리지도 않은 날고기를 씹었다.

남자는 소년을 보았지만 소년은 남자를 보지 않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 신경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겁도 없이 남자에게 다가오던 죽은 늑대와 똑같다.

초원의 생명은 사람도, 짐승도 서로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늑대를 해체하던 소년은 일어났다.

그때 처음으로 남자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자신을 가리키더니 남아있는 늑대의 잔해를 가리켰다.

"이것, 당신 몫."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죽였지 않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

반대로 소년이 주머니에 넣은 것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소년은 그렇게 늑대를 나누었다.

동시에 세상을 그렇게 나누었다.

초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세상을 버린 남자는 타인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남자는 일어났다.

 

 

소년은 초원 저 편에 말뚝을 박아 묶어둔 자신의 말에 올라타 달렸다.

말은 초원에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짐승이다. 삶의 터전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 너무 넓고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이다.

풀이 적고 메마른 대초원에서 목축을 하기 위해서는 넓고 물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냥감조차도 이 드넓은 평원에서는 한참동안 말을 달려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소년이 살고 있는 게르도 늑대를 잡은 곳에서 한참을 달려야 있는 곳이었다.

말 안장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에는 그리 많은 늑대고기가 있지 않다. 하지만 소년은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더 많은 늑대고기를 잘라냈다면 소년의 늙은 말은 제대로 달리지도 못한 채 초원 위에 쓰러졌을 것이다.

세상은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가질 수 없는 것은 결코 욕심내서는 안 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낸 대가는 고기가 썩거나 말이 쓰러져 초원 위에 뒹굴며 비참하게 맞이할 죽음으로 치러야 한다.

그것은 메마른 대초원에서 태어나 광대한 하늘을 보며 자라온 소년이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철칙이다.

이 고기는 부족하지만 소년의 게르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는 하루의 허기를 달랠 소중한 양식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초원에는 사냥꾼과 사냥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르륵!

수십의 남자들이 말을 타고 날뛰었다. 게르는 타올랐고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양떼가 남자들의 화살과 칼에 찍혀 도살당했다.

초원의 약탈자들이다.

소년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게르는 그의 것이다.

양떼는 그의 것이다.

가족은 그의 것이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고 그가 가져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약탈자들은 소년의 것을 소년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바꿔 버렸다.

약탈자 한 사람이 소년을 잡아채 말 위에서 떨어뜨렸다. 다른 약탈자가 소년의 말을 강탈했다. 또 다른 약탈자는 타오르는 불빛에 비친 소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찾았다."

약탈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이들은 소년이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것, 목숨마저 앗아가려는 것이다.

 

그때다.

-슈칵!

단 일격.

어둠 속, 빛이 번뜩이고 약탈자는 피보라를 뿌리며 쪼개졌다.

소년은 눈앞에 선 남자를 보았다.

초원 중심에 홀로 누워 늑대밥이 될 뻔했던 바로 그 자다.

소년이 물었다.

"왜 여기에?"

남자는 답했다.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복수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로서.

남자는 늑대밥이 될 뻔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열망도 또한 없었다.

처음으로 소년은 남자에게 생에 대한 실감을 주었다.

남자는 검을 뽑았다.

"벤다."

초원에 들어온 지 13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처음으로 검을 드는 순간이었다.

 

 

해가 다시 뜨고, 다시 졌다.

그때서야 소년은 재가 된 게르 앞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물었다.

"어쩔거지?"

소년은 답했다.

"내 것을 찾는다."

소년의 세상은 소년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소년이 잃어버린 것은 소년이 가질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가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남자는 웃었다.

"재미있겠군."

세상을 버렸다고 믿었던 남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세상을 버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피로 갚아줄만큼 받았던 적이 없었을 뿐이다.

사매에 배신당하고 친우가 저주하고 연인이 상잔한 그 순간 조차도.

 

비로소 남자는 진실과 마주했다.

그가 이루었던 힘도, 그가 만들었던 조직도, 그가 이루려 했던 뜻도 모두 그의 본질이 아니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자다.

단지 그것 뿐이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난 무영. 너는?"

소년은 짧게 답했다.

"테무진."

두 명의 복수자가 처음으로 서로를 '만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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