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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원포인트 꽁트

3. 끈




그는 고속열차를 탔다.



열차는 빠르게 남쪽으로 향했다. 해질녘의 들판과 강이 일직선의 선이 되어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차를 탈 때마다 보는 광경이지만, 그는 그 기하학적인 무늬에 자주 넋을 잃곤 했다.
그 선은 현실의 들판과 강, 기차역과 달리 단순하고, 간명하며, 순수하다.
기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세상의 사람과 관계와 일들이 음속을 넘나드는 고속도의 열차 속에서는 아주 단순명료해졌다. 복잡하고 얽혀 있던 만사가 마치 고속의 질주와 함께 갈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속열차도 복잡한 세상의 일부다.

승무원이 지나가는 통에 그가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
고속열차 천장에 달린 화면에서는 지역 브랜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돈을 많이 썼는지,
탈 때마다 보아야 하는 광고다.

남편과 아내가 나와서 고향 상품이 좋다며, 향토 브랜드를 외친다.
“고향으로 오세요!”
 
아주 촌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현실적이었다.
광고 속에는 연고와 지역, 친지와 인정에 호소하는 세상의 모든 복잡한 ‘얽힘’이 고스란히 드러나 오히려 어지러울 정도였다.

불현듯,
그는 목줄에 끈이 감겨 있는 현실감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끈.

수없이 많은 끈과 끈이 그와 세상을 연결하고 얽매고 옥죄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기차에 자신 말고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각기 달려 있는 수많은 끈들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미 이전부터 달리는 고속열차에 앉은 승객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끈에 휘감긴 채 앉아있었다.
단지 그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기하학적인 창가의 선에 시선을 돌려 버린 채로.

촌스럽다.
촌스럽고 어지럽다.
촌스럽고 어지럽고 숨막힌다.

오히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끈들에 비하면,
차라리 저 촌스러운 광고는 잠시라도 사람을 위로한다.
그 끈들은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라고.

불현듯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 촌스러운 광고가 용인되는,
지극히 촌스러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끈에 얽매여 촌스럽게 싸우다가,
촌스럽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자 아주 촌스럽게도, 모든 것이 그에게 부질없어졌다.
청운의 꿈을 품은 듯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문명을 날린 듯 백 년이나 남겠는가?

생은 짧고,
촌스러운 모든 것들과 부대끼며 낡아갈 것이다.

미뤄뒀던 피로감이 순식간에 그에게 밀려왔다.
아주 피곤했다.

그리고 정말 촌스러웠다.

고속열차가 멈췄다.
그는 무수한 끈에 얽매인 몸을 일으켜 촌스러운 몸짓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창가에는 그를 유혹하던 선명한 기하학의 선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세련된 분장으로 뒤덮었지만 촌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기차 역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그는 촌스러운 세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때다.
“뭐야, 늦었잖아!”
촌스러운 역사 계단에 볼을 잔뜩 부풀린 그녀가 앉아 있었다.
뿔테 안경과 보랏빛 슬리퍼가 도드라졌다.
그 순간 온 세상을 가득 메우던 끈들이 잘려나갔다.

수없이 많은 끈도,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촌스러움도,
일부러 꾸민 세련된 분장들도,
모두 의미를 상실한다.
복잡한 세상은 그 순간 아주 단순해진다.

보랏빛 슬리퍼를 통통 튀기며 달려와,
내 볼을 아프게 꼬집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빨리 좀 오라니깐!”
아픔에 눈물이 쏙 빠지면서도 그는 그 순간 볼 수 밖에 없었다.
딱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끈이.

이 순간 그가 가진 끈은 단 하나 뿐이다.
이 순간 그가 의미를 부여한 끈은 단 하나 뿐이다.
이 순간 그가 잡아야 할 끈도 단 하나 뿐이다.

그와, 그녀의 끈.

그는 웃었다.
"고마워."

그는 촌스러움 속에서 죽지 않아도 될 것이다.
끈을 스스로 잡을 수만 있다면.
혹은, 그가 끈을 스스로 만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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