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꽁트/원포인트 꽁트

원포인트 꽁트5-패스파인더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don-stewart/2369281599/ 
(Don Stewart)


패스파인더

‘문’을 통과했을 때, 그는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캬아아!
밀어닥치는 것은 천공을 뒤덮은 거대한 은백의 신수.
한 마리 용.
하지만 그는 공격해오는 자를 용서한 적이 없다.
용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용을 벴다.

쓰러진 용을 보며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두 개의 달이 지켜보는 하늘 아래서.

한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온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에 둥지를 틀었다.
갈 곳은 없어도 할 일은 많았다. 집을 짓고, 먹을 것을 찾고, 요리를 하며, 일생에 본 적이 없는 광경과 신기한 마수를 참하며 아득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푸른 해가 지고 두 개의 달이 뜨는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갔다.

일생 단 한 번도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던 평화였다.
한 개의 달만이 뜨던 땅에서 그는 황제를 참하고, 제국을 무너뜨렸다. 온 천하를 천군만마로 휩쓸고 온 세상을 전화로 불태웠다.
그로 인해,
그의 칼에 죽은 자는 백만이요, 그의 행보로 죽게 된 자는 1억이니.
이루고자 했던 꿈은 스러지고,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파멸했으며, 일생의 사랑은 떠났다.

파멸의 순간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문’이었다.
문을 지키던 용을 베고 이 땅 위에 선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고, 용이 서식하던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산에 감히 접근하려던 자도 없었다.
온 세상이 평화롭고, 또한 적막했다.
고독은 사람에게 과거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끝없이 뜨고 지는 두 개의 달을 보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의 일. 이제는 더 이상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아득한 기억 속 어딘가의 일이었다. 꿈에서 깬 뒤에도 그때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선명한 것이 있었다.
불타오르는 궁에서 그를 노려보던 소녀의 두 눈동자.
소녀는 그가 죽인 무사의 딸이었다.

그는 단지 그의 원칙대로 베었을 뿐이다.
피에는 피로.
받은 대로 갚는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받은 것도 없고, 갚을 것도 없었다.
단지 원한과 분노, 증오만이 다시 주어졌을 뿐이다.
그가 일으킨 전란으로 죽어야 했던 1억의 사람들도 그랬으리라.

그는 처음으로 속죄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이미 그가 떠나온 땅이 아니고, 그가 죽였던 이들도, 그를 죽이고 싶은 이들도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으로 평화로운 둥지를 떠나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죽어야 했던 1억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되돌아가야 한다는 상념이 그를 속박했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가야 할 자로 규정했다.

길을 떠났다.
다시 돌아가야 할 길을 찾아서.

거대한 산을 떠나 그는 드넓은 대륙을 일주했다.
나라와 나라를 건넜고, 전에 보지 못했던 이종족 지성체와 마주했다. 때로 성녀를 만난 적도 있고, 유혹하는 악마와 마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문’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거대한 대륙,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륙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거대한 대양 앞에서 길이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다시 자신을 향해 되물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두 개의 달이 지켜보는 밤하늘 아래서.

다시 거대한 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이 세상의 모든 길 위에서 알려진 자가 되었다.
이 거대한 대륙 위에 사는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의 무력을 원하는 자도 있었으며, 그의 혜안을 원하는 자도 있었고, 때로 그 자체를 갖고 싶어 오는 자도 있었다. 단지 그를 만나 이야기 한 조각이라도 듣기 위해, 생의 비밀을 얻기 위해 찾아드는 이도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것이 없었고, 그는 받을 것이 없다면 주지도 않는 자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날, 그는 고산의 마수 한 마리를 잡았다. 본래 용이 살던 이 산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마수들이 날뛰곤 했다. 마수들은 그를 찾아드는 사람들을 잡아먹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마수에게 복수하겠다며 찾아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었지만, 죽은 이들을 붙잡고 울부짖는 소리는 성가시기 그지 없었다.
마수를 베어버린 그는 이제 적막을 찾아 더 깊은 곳으로 둥지를 옮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그때였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자인가요?”

한 소녀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굳이 둥지에서 기다리지 않고, 여기까지 그를 찾아온 자였다. 절박함과 결의를 보아줄 법도 했지만 그에게 찾아온 이 중에서 절박한 이도, 결의를 보였던 자도 무수히 많았다. 간혹 생명을 걸었던 이조차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받을 것이 없었고, 때문에 준 적도 없다.
목숨을 걸고 마수의 숲까지 뛰어든 소녀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문제는 소녀의 눈동자였다.
선명했다.
마치 그가 꿈에서 보았던 소녀의 눈동자처럼.

소녀가 말했다.
“길을 찾고 있어요.”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길이라면 그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가 이곳으로 온 ‘문’이 있는 길, 그 문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길, 문이 왜 나타났는지 찾아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길을 찾지 못했다.
문으로 가는 길을.

소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가보지 않은 길이 없고 모르는 길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는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시 거대한 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 대륙의 길 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달이 뜨는, 이 세상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자가 되었다.

소녀가 요구했다.
“내게 그 길을 알려주세요.”

그 순간 그는 그의 적막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는 단지 길을 찾아다니는 자일 뿐이었다. 돌아가야 할 길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는 방랑자에 불과했다. 그는 길을 모르는 자였고, 그가 가야 할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가 ‘이 세상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자 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길이며 그가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길잡이를 요구한 소녀에게 그는 대답했다.
“좋다. 대신 대가를 치러라.”
그는 받은 만큼 베푸는 자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엇이든 드리겠어요. 금은보화든, 강력한 권세든, 아니면 저를 바쳐서라도! 무엇을 원하죠, 당신은?”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문’이다.
지금 그가 소녀에게 받을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을 떠돌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길이 끝나면 하나의 답은 되돌아온다.
그의 대륙행이 끝나고 이 대륙에는 ‘문’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듯이.

“길이 끝나면 그때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

떠나기 직전, 소녀가 물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죠?”
그는 답했다.
“길을 찾는 자(Pathfinder).”

두 개의 달빛이 하늘을 새기고,
소녀와 패스파인더는 길을 떠났다.

답을 찾아서.


    


'꽁트 > 원포인트 꽁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포인트 꽁트7-원점  (0) 2015.05.26
원포인트 꽁트6-달리기  (0) 2015.05.05
4. 촌스러움  (0) 2014.09.24
3. 끈  (0) 2014.09.24
2. 복수자들  (0) 2014.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