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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원포인트 꽁트

원포인트 꽁트6-달리기




그는 달린다.


그의 등은 꼿꼿하다. 아무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것처럼 거만하고 누구에게든 굽힐 수 있을 것처럼 유연하다. 아무 표정 없는 등이지만 어떤 얼굴보다도 그 등은 선뜩한 감정을 뿜어낸다.
달리는 이 순간, 그는 이 길 위의 지배자다.


길 위를 그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이 길이 황량한 개천길이었을 때부터의 일이다. 개천길 근처로 이사를 온 그는 이사 당일에 비가 오면 개천길이 흙탕길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묘하게도 그 해에는 비가 자주 왔고, 아침마다 그는 흙탕길과 전쟁을 벌이며 길을 나서야 했다. 아스팔트 장벽과 죽어가는 잔디가 흙탕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인 길을 그는 거의 뛰다시피 벗어나야 했고, 간신히 길 끝을 벗어나면 헐떡이며 길을 되돌아보곤 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비가 올 때마다.


언젠가부터 그는 비가 오지 않을 때도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와 개천길이 끝나 아스팔트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처음과 끝이 정해진 달리기는 그에게 묘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달리기를 온전히 끝마치고 나면 하루의 시작을 제대로 했다는 느낌에 하루 종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가끔 너무 급해 제대로 처음과 끝을 밟지 못한 채 그저 무작정 길을 지나칠 때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시무룩해질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길을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구청에서 개천길을 뒤엎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공사 중에는 개천길은 수시로 변화하는 좁은 통행로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그가 달릴 공간은 없었다. 공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그는 걸어야 했다.
달리지 못하는 개천길은 그에게 아무런 충족감도 주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집에서 나와 아스팔트 도로까지 나가는 똑같은 거리의 여정인데도 불구하고.


공사가 끝났을 때, 그는 개천길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아스팔트 장벽, 죽어가는 잔디, 흙탕물이 뒤범벅이 되어 있던 실개천 주위는  붉은 아스팔트로 새끈하게 모습을 뒤바꿨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오가던 간이 통행로는 녹색과 돌담이 어우러지고 새로운 간판까지 달아 구청의 정식 산책 통행로로 변모했다.

3500미터에 140억.
감이 오지 않는 수치에 그는 단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다.


개천길이 사라졌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와 접했고, 짜증을 냈으며, 어느 순간부터 달리는 충족감을 느낀 개천길이 사라졌다. 대신 붉은 아스팔트가 곱게 깔리고 흙탕물이 흐르던 실개천에는 수풀과 연못이 생겨났다. 처음과 끝이 분명히 정해져 있던 직선 비포장도로는 직선주로와 곡선, 회전로가 겹쳐 처음도 끝도 없는 하나의 갇힌 나선로가 되어버렸다.
기이하게도 그는 실망하지도, 분노하지도, 나태해지지도 않았다.


새로운 길을 밟았을 때,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길이 부숴지고 다시 만들어지던 그 기간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길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인공적인 길이 새로 생기는 동안, 그는 달리지 못했다. 
그는 그동안 달리지 못했던 만큼 신나게 3500미터의 새로운 길을 달렸다. 이 길은 전의 길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대신 직선과 곡선, 회전이 다채롭게 균형을 이뤄 오히려 심심하지 않은 질주로였다. 심지어 수풀과 연못까지도 습도와 공기를 적절히 맞춰 달리기에 더욱 편했다.


처음도, 끝도 없는 단지 달리기 위한 달리기였다.

오랫동안 달리지 못했던 그는 단지 달리고 싶었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충족감을 느끼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처음과 끝을 완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그는 달리고 싶었다.



말보다, 자동차보다, 비행기보다 그는 느리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몸을 직접 움직여 달리고 있었다. 발이 한 번 땅을 밟는 순간 반동은 발 끝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전율로 차올랐다. 다리가 뒤로 제쳐지면 근육이 울리며 피와 산소, 에너지를 요구했다. 심장은 잠깐 사이에 수백 번 회전하며 쿵쾅거리고 피부는 달아올라 땀구멍에서 물을 뿜어냈다.
그저 숨쉬던 순환기에 불과했던 그의 몸은 달리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무섭게 약동하는 생체 기관으로 변모했다.


물론 그는 곧 고통과 한계에 직면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단지 질주로를 반복해서 돌며 몸은 한계에 부딪쳤다. 피곤함과 심장을 옥죄어 오는 압박이 밀어닥쳤다. 공기가 온몸을 사슬처럼 휘감고 시야는 극도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달리는 자는, 한계에 맞서 인체를 극한에 치닫게 만드는 해방자다.


달리기 시작한지 30분.
시야는 갑자기 좁아졌고,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조차 머릿 속에서 사라졌다.
이 순간, 그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동작을 위해 종속되었고, 집중되었다.


달리기.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
오직 이것 뿐임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지배자가 되었다.
길 위의, 그리고 자신의 지배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달린다.
그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앞으로도 그는 그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달릴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지배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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