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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세상

유비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은 많다. 하지만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다.
유비는 흔히 삼국지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일컬어진다.
음흉한 녀석. 능구렁이. 무능력자. 뛰어난 의형제(관우, 장비)와 부하(조운, 제갈량, 법정, 방통 등등) 힘으로 황제까지 올라간 운만 좋은 인간.

 반대로 오랫동안 비판받아 온 조조는 영웅으로 추앙하는 경우가 많다.

 꼭 흥부전 같은 이야기다.
 오랫동안 흥부는 칭송받고 놀부는 비판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의 산업화 이후, 흥부보다 놀부가 더욱 인정받게 되었다. 상업화의 물결을 제대로 탄 놀부는 유능력자이며, 흥부는 무능력자라 가족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사실 놀부가 부자가 된 이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챈 후 고리대금을 했기 때문이다. 정당한 방식으로 성공한 게 아니지. 약탈경제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자본주의 사회라면 그다지 환영받기 어려운 방식이다.

 조조가 찬양받고 유비가 구박받는 것도 흥부전의 예와 비슷하다.
 오늘날 능률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조조는 능력주의의 대표이며 유비는 회고, 수구로 여겨지기 쉽다. 한 황실을 유명무실화 하고 아들인 조비에게 자신의 황실을 열게 하는 기초를 세운 조조는 새 세상을 연 혁명가이며 유비는 한실의 전통과 혈통을 중시하는 수구 보수로 칭해지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시각은 자본주의 쪽 시각이기도 하지만, 실은 중국 공산당 사가들의 시각이기도 하지. 어떤 면에서 극과 극은 통하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둘 다 근대화를 중시하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자.
 조조는 환관의 양자(조등)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수백만 금의 재산과 초 땅에 지역 기반을 지녔던 호족 출신이다. 이후 그가 세운 업적이라 일컬어지는 '구품중정제'는 실제로는 남북조 시대 귀족체제의 기반이 되었다.(참고로 조위 정권은 체계를 이룬 중앙 집중 권력이 아니라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깝기도 했다. 조조가 끝내 황제가 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대하는 호족들을 꺾을 수 없었거든.)
 
 한 마디로 조조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 자손에 지방 세력가 자손이었다.
 물론 더 우월한 조건을 지녔던 원소가 기업을 전부 말아먹은 것과 비교해 보거나 사서에 보이는 조조의 탁월한 전투 능력, 통솔력, 치정 등을 살피면 조조 자신의 능력이 중요한 동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애초에 조조는 상당히 우월한 지위에서 시작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비는?
 유비는 이름만 한 황실의 후예다(이도 실은 의심스럽다). 젊은 시절은 돗자리 장수로 보냈다(요즘으로 치면 길거리 불법 노점상이다). 여기에 건달 혐의도 붙어 있다(조폭도 겸한 셈이다).
 거리의 임협이었던 이가 이름 뿐인 핏줄과 시대를 타고 수많은 영걸들과 다투며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비가 자신만의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유비는 한실을 지키고(이건 사실 요즘 시대엔 별로 안 중요하지만),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인'을 지킨다는 방식을 관철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가 얼마나 지키기 힘든 일인지 보고 싶다면 조조가 행한 서주 대학살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0만 넘는 사람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학살한 만행은 너무나 잘 알려진 바다. 반대로 유비는 그 당시 군웅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백성에 대한 약탈 기록이 전혀 없다.

 삶에 있어서 '인'을 지킨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다. 
 어떤 이는 유비가 이른바 '덕 있는 인물'로 행세했다는 점에서 위선자라거나 능구렁이로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미래의 성공을 위해 초년부터 '덕 있는 사람'을 연기하고 생의 끝까지 관철시킨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 이전에 평생토록 모든 이를 속이며 살아간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른바 '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고 채찍질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흐트러지기 쉽고 남을 탓하기 쉬우며 이기적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마음을 제어해 이상으로 여기는 인간이 되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유비가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유비가 최고의 영웅은 아닐지언정 폄하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적어도 내게 평생토록 자신의 원칙을 관철한 유비는 탁월한 영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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