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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촌스러움



촌스러움

 

 

그는 고속열차를 탔다.

 

 

고속열차에서는 지역광고를 한다. 그 중에는 지역 향토 브랜드, 고려안을 홍보하는 광고가 있다.

그가 생에서 본 두 번째로 촌스러운 광고다.

 

 

그가 그 지역이나 브랜드에 악의를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단지 그 광고는 그가 넋을 잃고 바라볼 단순성과 세련됨이 전혀 없었을 뿐이다.

이는 미학의 문제다.

 

 

지극히 촌스럽다.

아주 숨막힐 정도로.

마치 ‘가짜’처럼.

 

 

그 지역에서 돈을 많이 썼는지 고속열차를 탈 때마다 그는 그 광고를 보아야 했다.

지극히 촌스럽기 그지없는 광고를 보던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이 촌스러운 광고가 용인되는 촌스러운 사회에서 촌스럽게 싸우다가 촌스럽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촌스러운 이야기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의 꿈을 품은 듯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문명을 날린 듯 백 년이나 남겠는가?

생은 짧고,

촌스러운 모든 것들과 부대끼며 낡아갈 것이다.

 

 

미뤄뒀던 피로감이 순식간에 밀려온다.

피곤하다.

 

그리고 정말 촌스럽다.

 

 

그에게 세상은 촌스러운 것과 촌스럽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촌스러운 것들은 그를 지겹고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촌스럽지 않은 것들이 그나마 있기에 그는 다만 이 촌스러운 세상을 버텨올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는 이 세상을 보다 촌스럽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 촌스러운 세상을 그 생각 하나로 버텨왔다.

 

 

하지만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는 끝내 촌스러운 세상에서 촌스럽게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을 돌리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창에 펼쳐진 광경은 아주 세련된 모습이었다.

해질녘, 진홍빛 노을과 노을에 비친 강이 일직선의 선이 되어 창문에 무늬를 그려냈다. 기차를 탈 때마다 보는 광경이었고, 한 순간에 지나쳐 버릴 모습에 불과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그 광경이 그의 시각을 사로잡았다.

 

촌스러움에 사로잡혀 있던 탓이었을까.

그 선은 기하학적이다.

 

 

창가의 광경이 선이 된다는 것은 고속열차가 빠르게 철로를 주파하고 있다는 뜻이다.

 

 

눈 한 번 깜박였을 때,

열차는 이미 구름이 잔뜩 낀 지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잠깐 빗방울이 스치더니,

순식간에 창가에 수없이 많은 빗방울이 와서 부딪치며 동심원과 흐르는 무늬를 만들어냈다.

 

일점, 직선, 원.

 

 

세상의 모든 무늬는 그 세 가지 원리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무늬는 단순하며 간명하고 순수하다.

결코 촌스럽지 않은,

본질에 숨어 있는 세련됨이다.

 

 

그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았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만큼 매혹적인 풍경이다.

그때,

그는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을 느꼈다.

 

 

이 광경은 순간이다.

눈앞의 순수함은 기차가 멈추는 순간 다시 촌스러운 세상의 풍경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의 순수함은 ‘진짜’다.

 

 

그가 ‘진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그가 만든 것이다.

촌스러움도, 촌스럽지 않은 것도.

 

 

기차가 멈췄다.

그는 다시 순수한 광경이 아닌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세상은 그에게 촌스러워 보였지만,

그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진짜’를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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